농사짓는 정릉파출소 경찰들
지난 4월 말 서울농부포털 현장뽐내기에 다소 색다른 글이 올라왔다. 텃밭 소식을 전하는 것은 매한가지이지만 농부들이 조금 특별하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민중의 지팡이’ 경찰이었다. 지팡이를 들고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경찰의 손에는 삽과 상추 모종이 들려 있었다. 옥상텃밭에 퇴비를 넣어 삽으로 뒤집고, 쌈채소와 열매채소를 심는 경찰의 모습이 친근하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정릉파출소입니다”로 시작하는 글은 강직한 경찰의 이미지와 다른 수줍음이 느껴졌다. “잘 키워서 주민들과 나눠 먹고, 소통하고 공감하는 장소로 활용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로 끝나는 글의 마무리도 정겹다.
농사짓는 경찰에 대해 기대를 하고 지난 5월 27일 서울성북경찰서 정릉파출소를 찾아갔다. 정석용 정릉파출소장과 김용범 팀장이 나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정석용 소장은 파출소 옥상텃밭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서울농부포털에 글을 직접 올린 이도 정석용 소장이다. 잘 활용되지 않는 텃밭을 직원이 함께 농사짓는 공유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것도 그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올해 팀별로 텃밭을 나눠줬어요. 직원들이 서로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했어요. 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현장에 갔다 와서 스트레스가 쌓이면, 올라가서 물도 좀 주고 상추가 크는 것도 보면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고요. 자라면 따서 가족들과 먹도록 했어요. 이런 취지로 시작해서 팀별로 잘 키우고 있고요.”
파출소가 북한산 자락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어 전망이 무척 좋다는 김용범 팀장의 말에 서둘러 옥상텃밭으로 향했다. 옥상 문을 열자 빌딩숲 사이로 서울시가 내려다 보였다.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공기가 너무나 시원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허전했을 옥상을 9개의 큰 상자텃밭과 그 안에서 싱싱하게 자라는 다양한 채소들이 채워주었다. 서울시를 풍경으로 한, 라이프 스타일 잡지에 나올 법한 그림 같은 옥상텃밭이 펼쳐졌다.
줄과 열을 잘 맞춰 심은 상추, 상추 사이로 고추, 토마토, 가지 등 열매채소가 자란다. 그리고 여주와 오이가 끈을 엮어 만든 망을 타고 올라가면서 모든 작물이 서로 잘 어울려 멋진 정원을 이룬다. 옥상텃밭을 가꾸는 경찰과 근엄한 파출소 옥상의 푸른 텃밭. 고정관념이 보기 좋게 깨진다. 함께 취재를 온 김성민 기자도 “전문가의 솜씨가 느껴진다”고 감탄했다. 상자텃밭에는 정릉1팀부터 정릉4팀, 그리고 관리팀이라고 적힌 푯말이 꽂혀있다. 정릉파출소 5개 팀이 9개의 상자텃밭을 나누어 경작하고 있다. 도시텃밭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이곳 파출소 옥상텃밭에서도 펼쳐져 있다.
스트레스가 많은 경찰, 텃밭 힐링이 필요해
좀 더 자세히 텃밭의 사연을 들어봤다. 경찰은 보통 2년 단위로 근무지를 옮기다 보니 텃밭이 설치된 시기나 경위를 정확히는 알 수는 없다. 정석용 소장은 전에 다른 곳에서 일할 때 정릉파출소에 옥상텃밭이 있다는 걸 들은 적이 있다는 기억을 이야기하며 대략 4년 전에 설치된 텃밭으로 추정했다. 성북구청에 등록된 텃밭이고, 올해 구청으로부터 퇴비 지원을 받은 것으로 보아 서울시와 성북구청의 지원으로 설치된 텃밭이다.
작년까지는 전임 소장이 농사를 짓고, 농작물을 직원들에게 나눠주는 정도로 활용했다. 정석용 소장이 부임하면서 올해 처음 옥상텃밭을 전 직원에게 개방해 함께 농사를 짓게 됐다. 경찰의 열악한 근무환경과 험한 일을 맡는 업무의 특성으로 인해 직원들이 받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우리 파출소가 신고가 적은 파출소는 아니거든요. 파출소와 지구대를 합쳐 6개가 있는데 그중 3번째로 신고가 많아요. 아무래도 경찰은 피의자와 접촉하잖아요. 좋은 소리를 듣고 오는 게 아니죠. 칭찬받으러 가는 게 아니잖아요. 직원들은 현장에 나가 피의자를 체포하는 등의 여러 가지 일들을 당연하게 하지만, 그게 보이지 않게 스트레스로 쌓이고 트라우마로 남아요. 옥상에 올라가서 훌훌 털어버리라고 농사를 짓자고 했죠.”
정릉파출소 정석용 소장
경찰은 주민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궂은일을 도맡는다. 김용범 팀장은 모든 신고는 112로 통한다고 설명했다.
“불이 나든 수도가 망가졌든 개가 짖든, 경찰의 업무가 아닌 것도 경찰이 맡아야 하죠. 술을 먹고 차를 어디에다 둔 지 모르겠다고 걸려 오는 전화도 다 경찰의 업무예요. 우리는 일일이 나가서 조치해야 합니다. 다른 기관의 업무인데, 다른 기관은 전화해도 안 받아서 포기를 하게 되죠. 왜 112로 신고했냐고 물어보면 다른 기관은 전화를 안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경찰에 전화해야만 해결이 된다는 거죠. 경찰이 현장에서 다른 기관에 연결해주는 그런 사건들이 참 많아요.”
경찰은 시민의 불편함을 가장 먼저 나가서 그리고 가장 늦게까지 남아서 해결한다.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우리의 고통을 해결해 주는 이들의 고통은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민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을 하는 경찰이야말로 힐링이 필요한 직업이다. 고통의 치유가 필요하다. 정릉파출소의 텃밭 농사는 삶의 여유를 찾는 것 이상, 그들의 절실한 문제와 닿아있었다. 옥상텃밭은 큰 힘이 된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주민들을 기분 좋게 해 줄 수 있으려면 경찰 자신의 내적 만족도가 높아져야 하잖아요. 내 마음이 웃어야지 일의 처리가 원만하고 주민을 위해서 더 힘을 내 일을 할 수가 있거든요. 소소하지만 옥상텃밭과 농사가 마음을 정화하고, 이런 작은 만족이 주민을 위한 더 좋은 경찰 서비스로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서울시민 여러분, 함께 농사를 지읍시다’
4월 처음 농사를 시작해 이제 한 달 조금 넘게 농사를 지었다. 짧은 시간에 작물들이 훌쩍 자라면서 그만큼 즐거움도 늘었다. 정성스럽게 돌보면서 작물과 정서적 교감도 나누고, 동료들과의 교류도 많아졌다. 건강하고 싱싱한 채소로 밥상이 풍성해지면서 복지 차원에서의 만족감도 커졌다. 올해 처음 농사를 지어보는 초보 농부 이민주 순경은 신기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저도 시골에서 태어나긴 했는데, 이런 경험이 없어서 키워보고 싶긴 했는데 근무하면서 제가 직접 키워보고 뜯어서 먹고 보고 하니깐 좋은 경험이 되는 것 같아요. 힐링도 되고 스트레스 해소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정릉파출소에는 40명의 경찰이 팀을 이루어 근무하고 있다. 4교대로 일하다 보니 팀 간의 교류는 힘든 환경이다. 하지만 텃밭농사를 계기로 함께 하는 일이 생기고 공통의 화젯거리가 생겼다. 정석용 소장은 파출소의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사실 같은 팀이 아니면 서로 관심도 두기 어려운 그런 시대잖아요. 그래도 텃밭을 통해서 너희 텃밭 우리가 물 줬다고 말하기도 하고, 고추 줄을 매야 한다는 관리 노하우도 알려주고 하다 보면 팀 간의 교류가 생기는 거죠.”
정릉파출소의 옥상텃밭은 성북경찰서에서도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고 한다. 파출소 게시판에 텃밭 소식을 알리면서 농사를 잘 지어서 꼭 식사에 초대해달라는 등의 많은 호응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성북경찰서 서장이 정릉파출소를 방문해 텃밭을 둘러보고 상추를 따서 함께 식사하는 일도 있었다.
정 소장은 옥상텃밭이 정릉파출소의 복이라고 말했다. 동료 경찰의 어려움을 헤아리는 그는 자신들이 누리는 복을 다른 많은 경찰도 누렸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과거처럼 술이나 담배로 스트레스를 풀지 않고 텃밭을 가꾸면서 해소될 수 있게끔 이런 텃밭이 더 많이 보급됐으면 좋겠어요. 서울시가 지원을 많이 해줬으면 좋겠어요.”
늘 현장을 나가는 경찰. 계속되는 신고와 출동으로 파출소에 잠시라도 있기도 쉽지 않다. 너무나 바쁜 와중에도 잠시 틈을 내어 옥상에 올라가 텃밭에 물을 준다. 물을 주는 것조차 일이 될 수 있지만 경찰 업무에 비하면 휴식이고 즐거움이다. 서울농부포털에 정릉파출소에 대한 글을 올린 이유는 농사짓는 시민들을 독려하고 응원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정릉파출소 경찰도 시민들처럼 농사를 짓고 있고, 함께 농사를 짓자 말하고 싶었다.
“저희가 잘 키워서 저희 모습을 서울시민이 서울농부포털을 통해서 보시고, 풀 한 포기라도 키워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어요.“
최승덕 책임편집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