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산이 가까이에서 5월의 신록을 뽐낸다. 경기도 안산 부곡동 작은 마을들이 굽이굽이 뻗은 수리산 능선에 기대어 있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농업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는 고장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 선생이 이곳에 살며 농업 중심의 사회 개혁론을 설파했다. 이익 선생은 전주 유씨의 가택 청문당에서 정약용의 스승인 안정복과 강세황 등 후학을 길러냈다. 청문당은 강세황이 김홍도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곳이기도 하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인 최용신 씨가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던 무대이기도 하다.
현재도 잘 보존돼 있는 청문당을 조금 지나면 우리나라 전통농업을 연구하며 도시농업 활성화에도 앞장서 온 안철환 온순환협동조합 대표가 운영하는 ‘바람들이 농장’이 나온다. 안철환 대표는 2000년부터 바람들이 농장에서 씨앗과 자원이 순환하는 농사를 지으며 도시농업 교육 실습장으로 운영해 왔다.
안철환 대표는 지난해 겨울부터 바람들이 농장에서 산림생태텃밭이라는 새로운 농업을 시도하고 있다. 산림생태텃밭은 자연을 모방해 식용이나 약용식물을 고유의 생태적 특성을 고려한 다층적인 재배방식으로 키우며 생태정원 형태로 구현한 텃밭이다. 모방의 대상이 되는 자연은 숲이다. 숲은 다양한 식물들이 수평 공간뿐만 아니라 수직 공간을 나눠가지며 공존한다. 높이 자라는 교목, 사람 키보다 낮은 관목, 산채 같은 초본류 등이 수직공간을 층층이 채우고 덩굴식물이 각 층들을 가로지른다. 산림생태텃밭에서는 유실수 아래 관목류, 덩굴식물, 채소, 산채, 약초 등을 사이짓기 및 섞어짓기 방식으로 층층이 키운다. 유기순환농업으로 주목받고 서양의 퍼머컬처에서는 먹거리숲이라고 부르는데, 산림청에서 먹거리숲을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적용하고 산림생태텃밭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산림생태텃밭의 개념을 듣고 안철환 대표와 함께 텃밭을 둘러놨다. 낙엽송 통나무로 네모났게 구획된 틀밭이 규칙적으로 배치돼 있고, 틀밭 사이로 사람들이 다니기 좋게 넓은 통로가 있다. 틀밭 밖으로도 화살나무와 같은 약용관목들이 심어져 있다.
5월 초순 일반적인 밭에는 모종을 심고 씨를 뿌린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푸르름이 덜하다. 하지만 바람들이 농장 틀밭에는 온갖 종류의 산채로 뒤덮였다. 넓은 잎 사이로 산마늘이 꽃대를 올렸다. 작은 꽃들이 알알이 달린 꽃뭉치가 수줍은 듯 고개를 떨궜다. 미나리와 쑥을 섞어놓은 것이 생긴 전호도 하얀 꽃을 피웠다. 풍을 예방해준다는 방풍, 이름도 재밌는 파드득, 울릉도 특산물로 부지갱이라고도 불리는 섬쑥부쟁이, 임금의 수랏상에 올랐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어수리, 향이 좋고 장아찌로 인기가 많은 곰취, 산나물의 제왕 참취, 이른 봄 녹지 않은 눈을 뚫고 나온다는 눈개승마 등 몸에 좋고 맛도 좋은 다양한 종류의 산채들이 가득하다.
안철환 대표가 어수리는 단종이 특히 좋아했다며 먹어보라고 권했다. 여린 잎 하나를 따서 씹으니 쓴 맛은커녕 너무나 달았다. 어릴 적 봄에 들과 산을 다니며 찔레 순과 삘기를 따 먹었을 때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안 대표는 곤드레는 맛이 없는 나물이라 설명했다. 그런데 그게 강점이란다. 특별한 맛이 없기에 물리지 않고 맛이 강하지 않아 나물밥으로 해 먹을 수 있다. 특별한 맛이 없는 건 다양한 영양분이 고르게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바람들이 농장에서는 그 외에도 곤달비, 모시대, 잔대, 달래, 부추, 도라지, 작약, 미역취, 참나물 등 모두 25종이나 되는 산채를 키운다. 4월과 5월 봄의 정취도 느낄 수 있고, 겨울을 보내며 허약해진 몸의 기운을 북돋우는 웰빙 먹거리들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른 봄 산과 들에 나가 나물을 캐 죽과 떡을 해먹으며 보릿고개를 이겨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생겨나 우리나라의 나물 식문화는 세계 어느 민족과도 비교할 수 없는 채식문화이다.
산림생태텃밭에선 선조들이 했던 먹거리의 계절적인 순환을 재연한다. 겨울을 이겨낸 산채들이 이른 봄을 채운다. 다년생인 산채는 5월 말이 되면 휴면기에 들어가고 그 때 가지, 오이, 고추, 옥수수, 콩, 호박 등의 밭작물을 심는다. 여름작물을 수확하고 늦가을엔 산채들이 나오고, 다시 겨울에 월동을 해 이른 봄을 풍성하게 한다. 겨울작물과 여름작물이 순환하면서 사계절 내내 푸르른 텃밭과 풍성한 먹거리를 즐길 수 있다.
바람들이 농장 한편에는 작은 온실이 있다. 온실에서는 오이, 고추, 가지, 옥수수, 토마토 등 밭작물 위주의 모종이 자라고 있다. 토마토를 제외한 모든 작물이 토종종자이다. 안 대표는 계절에 따른 작물의 순환을 위해서는 모종을 길러낼 온실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산채 끝날 때 맞춰 고추를 심어야 한다. 난 고추를 10년 동안 직파를 했지. 4월 중순에는 직파를 해야 하는데, 그때는 산채가 무성할 때다. 그러면 고추가 못 올라오지. 그래서 모종을 심어야 한다. 이런 텃밭 시스템에서는 온실이 핵심이다.”
밭이야? 숲이야?
숲의 주인은 나무들이다. 나무들이 숲을 영토로서 지켜내며 그 안에 다양한 생물들을 품는다. 산채는 나무가 제공하는 그늘 아래 어우러져 자란다. 바람들이 농장에서는 산채들 위로 대추나무, 자두나무, 감나무 등의 유실수 비롯해 두릅나무, 엄나무, 마가목 등이 다양한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그리고 농장 한 편에 있는 울타리 텃밭에는 포도나무와 다래나무가 자라고 있다. 포도와 다래 넝쿨이 울타리를 타고 올라가 뒤덮으면 그늘이 만들어지고, 그 아래에는 특히 음지를 좋아하는 산채를 심을 예정이다. 아직은 어린 나무들이라 숲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대략 3년이 지나면 열매를 수확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다.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나면 다양한 식물들이 어우러진 멋진 경관과 먹거리가 있는 숲이 될 것이다.
안철환 대표는 산림생태텃밭의 장점으로 텃밭 공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공간을 다층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데다가 1년 내내 텃밭을 활용한다. 그래서 1년 내내 다양한 먹거리가 나온다. 빼어난 경관도 산림생태텃밭의 매력이다. 도시텃밭의 경우 여름과 가을에는 좋은 녹지공간을 제공하지만 겨울과 이른 봄이 아쉽다. 그래서 산림생태텃밭은 도시텃밭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정원형 텃밭의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산림생태텃밭을 도시텃밭에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겨울에는 폐장하는 도시텃밭은 겨울작물과 다년생 작물을 심을 수 없다. 그래서 한해살이 여름작물 위주에서 벗어나 다양한 유형의 도시농업 모델을 개발하고 확장하는 데 있어 민간의 역할이 중요하다. 안철환 대표가 산림청을 지원을 받아 자신의 텃밭에 산림생태텃밭을 조성한 이유이다. 새로운 실험을 하며 도시농업의 영역을 확장하고 알려내기 위해서다.
“도시 속에 산림생태텃밭을 제공해 완벽하지 않지만 제한적이라도 도시농업을 통해서 숲을 도시에서도 즐겨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꿈을 꾸어보는 거지.”
자급자족하는 농사, 숲에서 방법을 찾다
농장을 모두 둘러보고 안철환 대표와 평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놨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산림생태텃밭의 매력은 텃밭 공간의 효율적 이용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다양한 작물들의 섞어짓기, 계절에 따른 돌려짓기, 기계의 사용을 최소화하는 무경운과 지속가능한 농업을 지향하는 유기순환농업, 숲의 순환을 이용한 농업 등 현대농업의 대안이 산림생태텃밭에 녹아들어 있었다.
그는 단작 위주의 농사가 농업을 망가뜨린다고 지적했다. 농부의 권리를 오롯이 지킬 수 있는 자립적인 농업이 돼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급자족하는 농사가 돼야 한다고 했다. 자급자족하는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더 자연에 다가가야 하며, 그런 자연은 숲에 있다고 말했다.
“먹거리숲을 알기 전부터 공부를 하면서 숲으로 가야만 대안이 있겠구나하고 생각하게 됐지. 숲과 어우러지고, 야생과 어우러지는 걸 생각한 거지. 그래서 농장에 제일 먼저 심은 게 달래였다. 달래가 전형적인 야생이다. 세 뿌리를 얻어다 심은 게 저렇게 번 진거야. 우리 밭에는 야생이 지천이야. 냉이도 많고 쑥도 많고. 곤드레도 야생이고, 이런 산채도 야생이다. 지금 막 작물화되고 있지만 아직은 야생단계다. 이곳에서 야생을 야생답게 키우려고 하는 거지. 그래서 야생과 작물이 서로 어우러지는 농사가 자급자족하는 농업의 기초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먹거리숲을 접하게 됐지. 아, 이게 답이다
텃밭 한 편에 있는 장독대가 고즈넉함을 더한다. 앉은뱅이 밀밭에는 포동포동한 알곡이 수북이 달려있다. 수리산의 신록이 텃밭으로 전해져 온다. 바라만 보고 있어서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는 텃밭이 바람들이 농장이다. 소박한 삶, 텃밭으로도 충분한 생활. 이곳이라면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와 같은 시골생활도 가능할 것만 같았다. 낭만적인 전원생활이 아니라 자립적인 삶을 향해 더 치열하게 고민하며 대안을 찾아 나선 농부는 텃밭에서 ‘작은 숲’을 가꾼다.
최승덕 책임편집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