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지의 비극.’ 주인이 없는 목초지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욕심 많은 목동들이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고 더 많은 양을 풀어놓습니다. 그러다 결국 풀 한 포기 남지 않아 아무도 양을 키울 수 없는 황무지로 변합니다. 개인들의 사욕으로 공동체의 이익이 파괴되기 때문에 공유지는 국유화나 사유화를 통해 관리해야 하며, 공동체가 함께 관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게 ‘공유지의 비극’에 담긴 내용입니다.
종로구 무악동에 위치한 무악현대아파트 어린이놀이터도 이런 ‘공유지의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공유지의 비극’ 원래 내용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아파트 단지 밖 외딴 곳에 위치한 놀이터는 아이들이 선뜻 오기 어려웠습니다. 공유지에 대한 개인들의 욕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16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 방치됐습니다. 그 동안 공유지를 파괴시킨 건 사유화였습니다. 얼마간은 노숙인들이 점유하면서 놀이터 시설을 망가뜨렸습니다. 이후에는 몇몇 주민들이 점유하면서 다른 주민들을 배제하고 그들만의 사유지가 됐습니다. 그런 동안 인왕산 자락 멋진 풍경 속에 봄이면 개나리꽃이 만발하는 아름다웠던 놀이터는 폐기물이 쌓인 황폐한 곳으로 변했습니다.
이렇게 망가진 공유지는 주민들의 협력으로 회복됐습니다. 무악현대아파트 주민들이 나서서 공유지에 대한 권리를 되찾고, 주민들이 함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텃밭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아이들이 흙놀이를 하며 자연을 체험할 수 있는 새로운 놀이터가 됐습니다. 그리고 파편화된 개인들이 공유지를 파괴하는 경쟁을 벌이는 게 아니라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며 지속가능한 공유지를 함께 가꿔나는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이달의 서울농부’에서 도시농업공동체로는 처음 선정된 ‘혜윰뜰도시농업공동체’는 주민들의 소통과 협력이 다른 어떤 방법보다 공공재를 잘 관리하고 유지시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난관을 극복하고 만든 텃밭
‘혜윰뜰도시농업공동체(이하 혜윰뜰공동체)’는 무악현대아파트 31세대, 100여명의 주민이 참여하는 제법 큰 공동체입니다. 2018년 말부터 활동을 하며 2019년 4월 서울시 도시농업공동체로 정식 등록했습니다. 혜윰뜰공동체가 자신들의 텃밭을 갖게 된 때는 그로부터 한 달 뒤 ‘무악현대아파트 도시텃밭’이 정식 개장한 이후입니다. 도시농업공동체를 먼저 만들고 텃밭 개장을 준비한 겁니다. 텃밭을 만드는 과정이 너무나 힘들어서 텃밭을 꼭 만들어야 한다는 아파트 주민들의 뜻을 보여주기 위해 도시농업공동체를 먼저 만들었습니다.
방치된 어린이놀이터를 도시텃밭으로 만드는 데에는 무려 3년이 넘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일에 앞장 선 이는 채동균 입주자 대표회의 회장입니다. 2016년 입주자 대표회의 회장이 된 그는 아파트 현황을 점검하다 아파트에서 조금 떨어진 550㎡ 크기의 공터가 원래는 아파트 공유부지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10년 가까이 그 공터를 몇 명의 주민들이 무단 점유해 텃밭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아파트 주민 누구도 공유부지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무단점유가 일어나는 동안 놀이터 시설이 망가지고, 쓰레기장으로 변했습니다. 심지어 불법 소각이 일어나는데도 사유지로 알고 있어 누구도 제지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채동균 회장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분석하여 대안을 찾았습니다. 바로 텃밭이었습니다.
“놀이터가 왜 방치되고 무단점유가 일어났는지, 과거에 어떤 잘못이 있었는지 원인을 찾아봤어요. 결국 관심 있는 사람들이 이 공간에 찾아와 사용을 해야 하는 거죠. 그게 안됐어요. 그러면 여럿이서 이 공간을 관리하게 하자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게 뭘까 생각하다가 생태정원을 떠올렸죠. 주민과 계속 이야기를 해보니 의외로 공유지라도 땅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계셨어요. 그럼 여기다 우리가 농사를 지어보자고 이야기가 됐죠. 여기까지는 주민들이 제도에 대한 아무런 이해 없이 그런 결론에 다다른 거죠. 그리고 그 미션이 저에게 주어졌죠. 주민들이 저에게 텃밭을 만들어 보라고 한 거죠.”
텃밭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무단점유부터 해결해야 했습니다. 무단점유를 하고 있는 주민들을 만나 설득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1년을 넘게 찾아가 이야기를 나눴지만 해결되지 않고, 2018년 10월 경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증명을 보낸 후에야 무단점유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그 분들도 처음에는 노숙자들로부터 땅을 지키려는 선의로 점유를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처음의 뜻과는 다르게 본인이 너무 오랫동안 잘못된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고 하시면서 본인들 스스로 쓰레기도 밤 새 치우시고 퇴거를 하셨어요.”
또 다른 난관은 행정절차였습니다. 놀이시설 부지를 텃밭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용도변경을 해야 했습니다. 종로구청의 안내에 따라 주민들을 만나며 동의를 받아 서류를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헛수고였습니다.
“공동주택 시설에는 노인시설이나 어린이 놀이시설과 같은 17개 항목의 용도가 정해져 있어요. 거기에 텃밭이 없다는 거예요. 너무 황당했죠. 이 서류들이 다 쓸 데 없는 거냐고 물어보니 그렇다고 하는 거예요. 진짜 터덜터덜 돌아와서 생활지원센터(아파트 관리소) 소장님과 손잡고 이건 포기해야겠다고 이야기를 했죠.”
이후 생활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아 여러 방안을 찾아보고 용도폐지라는 행정절차에서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용도폐지를 하면 텃밭 사용을 제한할 법적 근거가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구청이 난색을 표했습니다. 시설을 지을 수 있는 값비싼 땅을 몇 사람만의 의견으로 용도폐지를 허가해 주는 게 구청의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 됐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처럼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작년 4월에 인천에서 열린 도시재생 산업박람회에 찾아가 부스를 운영하던 공무원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구청 공무원이 있어서 제가 사람들 막 헤치면서 이 사안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경호원 같은 분들에게 막혀서 직접 이야기는 못 드렸어요. 다른 분을 통해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와달라고 했어요. 막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깐 구청장님이 제가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본 거예요. 도시농업을 해보겠다고 인천까지 찾아온 주민을 보시고 진정성을 느끼셨나 봐요. 방법을 찾아주라고 하신 거죠.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담당 주무관과 서로 미안한 마음에 눈이 빨개지도록 이야기하고 서로 격려했죠.”
곧 바로 종로구청에서 텃밭을 조성했습니다. 주민들도 쓰레기를 줍고, 돌을 골라내며 텃밭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5월 11일 텃밭 개장을 축하하는 잔치를 열었습니다. 아파트 주민, 김영종 구청장, 구청 공무원 등이 함께 한 개장식은 감격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주민들은 텃밭에 모종도 심고, 서로의 마음속에 희망과 우애도 함께 심었습니다.
텃밭 경작이 주민자치활동으로 이어지다
텃밭을 조성하고 마을에는 많은 변화들이 생겼습니다. 비슷한 시기 방치됐던 아파트 내 다른 공간에도 ‘혜윰뜰작은도서관’이 생겼습니다. 공유공간이 생기면서 아파트 주민들의 만남이 많아졌습니다. 벼룩시장을 열기도 하고, 수확한 배추로 김장을 담가 어려운 이웃들에게 기부도 했습니다. 올해는 텃밭에서 음악회와 영화제도 열 계획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새로운 놀이터를 갖게 됐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열심히 밭을 일구고, 모종을 심고 작물을 가꿨습니다. 당번을 정해 돌아가며 텃밭을 청소하고 화단에 물을 줬습니다. 직접 농작물을 수확해 이웃과 나눠먹기 위해 아파트 승강기 입구에다 가져다 놓기도 했습니다. 조금씩 사라지는 농작물을 매번 확인하는 것도 아이들을 즐겁게 하는 놀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김병옥 혜윰뜰공동체 총무는 “이웃과 소통이 되는 거죠. 소통이 안 됐다가. 맛있는 것도 나눠먹고, 텃밭을 안했으면 이웃의 아이들을 어떻게 알았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텃밭에 있는 정자는 주민들이 모여 마을 소식을 나누고 마을 일을 의논하는 쉼터가 되고 있습니다. 채동균 대표는 “구지 약속을 잡지 않아도 텃밭에서 자연스럽게 주민들이 만나게 돼요. 그러다보면 서로 아파트 일에 대해 자연스럽게 논의하게 되고 주민자치활동으로도 이어지죠. 텃밭에서 활동하다가 입주자 대표회의에 자연스럽게 힘을 더해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 점에서 가장 큰 보람을 느끼고 있어요”라고 소감을 밝혔다.
공동체가 나서서 텃밭을 만듦으로써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리고 텃밭 활동을 계기로 더욱 촘촘해진 주민들의 관계망이 혹시나 발생할 지도 모를 ‘공유지의 비극’을 극복할 것입니다.
최승덕 책임편집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