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아들이 가끔씩 텃밭 농사를 돕는다. 모종을 심을 때나 감자 같은 걸 수확할 때인데 체험 수준이지만, 요즘 아이들에게는 아주 좋은 경험이라 생각해 꼭 데리고 나가려고 한다. 몰론 해가 갈수록 그 횟수는 줄고 있다. 지금은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쥐고, 또 한 손에는 태블릿 PC를 들고서 게임과 유튜브를 동시에 즐기는 초등학생이 되었지만, 어릴 적에는 꼭 동화책을 읽어 주어야 잠이 들곤 하는 아이였다. 이때 읽어주었던 동화책중의 하나가 ‘짱구네 고추밭 소동’이다. '강아지똥‘, ’ 몽실언니‘로도 유명한 아동문학가 권정생 작가가 글을 쓰고 김용철 작가가 그림을 그린 작품이다.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
▲ 권정생 작가의 ‘짱구네 고추밭 대소동’. 어른들이 읽어도 재미있다.
쓰르라미들이 한가롭게 울고 있는 상수리나무 비탈진 산등 너머에는 짱구네 고추밭이 있다. 짱구네 엄마와 누나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거름 소쿠리와 똥오줌 자배기를 져나르며 고추들을 키웠다. 수확철이 되었을 때 짱구네 엄마와 이웃집 돌이 엄마는 고추밭 둔덕에서 강 건너 대추나무 마을에 고추 도둑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고추들은 걱정이 되었지만 이렇게 말했다. ‘심은 사람이 거두어야 하는 거야’, ‘화를 내는 건 어리석은 걸, 용기를 내자꾸나’. 고추들은 자기들이 고추밭을 지키기로 마음먹는다. 며칠 후, 이상한 그림자가 밭에 나타나 고추들을 자루에 쓸어 담아 도망을 갔다. 고추들은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이내 자루 속에서 탈출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불의와 싸우자.’ 고추들이 자루 속에서 씨근거리며 몸부림을 치자 자루는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고추들은 어찌 되었을까? 이후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자. 아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개되니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보시길 권하다. 특히나 귀여운 아기 고추들의 대화가 아주 재미있고 인상적인데, 아이와 함께 고추 모종을 심을 때나 고추를 수확할 때 가끔 생각이 나곤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청양고추 모종 몇 주와 꽈리고추, 아삭이 고추를 심었다. 매운 풋고추를 쌈장에 찍어 먹는 것을 좋아해서 청양고추는 빼놓지 않고 심는다.
▲ 직접 수확한 고추. 매년 다양한 종류의 고추를 심었다.
이 매운 청양고추가 개발된 건 벌써 40년 가까이 지난 1983년이다. 당시 중앙종묘의 유일웅 박사가 제주도 고추와 외국 고추를 교배하고, 이를 청송군과 영양군 농민들과 함께 시험 재배해 개발했다. 이름도 두 지역의 이름을 하나씩 따와서 청양고추로 붙여졌다. 이후 특유의 얼얼하면서도 청량한 맛이 인기를 끌며 매운 고추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문제는 IMF와 함께 찾아왔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이 매운맛의 고추는 1998년 IMF의 여파로 중앙종묘가 멕시코 종자기업 세미니스로 매각되면서, 종자의 소유권 역시 넘어가게 되었다. 1995년 세미니스는 GMO 종자와 제초제로 악명을 떨치는 미국 기업 몬산토로 합병이 되었고, 몬산토는 다시 독일계 제약회사 바이엘로 합병이 되면서 청양고추의 소유권도 바이엘이 소유하게 되었다.
다만 2012년 몬산토코리아를 국내 기업인 동부팜 한농이 인수하는 과정에서 청양고추의 국내 판권을 인수하게 된다. 소유권도 인수하려했지만 몬산토 측이 터무니없이 비싼 금액을 요구하는 바람에 무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6년에는 LG화학이 동부팜한농을 인수하면서 청양고추의 국내 판권은 LG화학의 소유가 되었다. 물론 소유권은 아직도 바이엘이 가지고 있다.
▲ 매운맛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청양고추
IMF 당시 외국으로 팔려나간 종자기업은 비단 청양고추를 개발한 중앙종묘뿐만이 아니다. 흥농종묘 역시 세미니스로 넘어갔고, 서울종묘는 노바티스, 청원종묘는 사카다로 넘어가게 되었다. 우리 농산물을 먹는 것 같지만 해외로 돈이 빠져나가는 아이러니한 일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규모도 엄청나다. 올해 9월 농업진흥청의 발표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9년까지 해외로 지급한 종자 로열티는 1,357억 6,000만 원이며 최근에도 매년 100억 원대의 로열티를 지급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런 과정에서 국가적인 손실도 손실이지만 현실적인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들이 떠안고 있다. 올해 고추 씨앗 가격은 1,200립 한 봉지에 18만 원 선이다. 종자값, 비료값, 인건비 계산하면 농사는 지을수록 믿지는 일이지만, 고추만한 환금성 작물도 없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판이다. 동화에서처럼 ‘우리가 고추밭을 지키자’ 하고 힘을 내서 해결되는 문제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데, 어른들의 동화는 현실을 반영한다. 그렇게 진짜 고추밭을 지켜내려는 농민들의 분투는 버겁다.
<초보 도시농부를 위한 고추 재배 팁>- 노지에 심을 경우 아래쪽 땅에 상추를 같이 심어주면 탄저병 등을 예방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 상자텃밭이나 화분에 심을 경우에는 30cm 이상의 깊이가 있는 화분을 이용한다.
- 고추는 가지가 계속 벌어지며 자라기 때문에 지주대가 꼭 필요하다. 1.5m 정도의 지주대를 꽂고 끈으로 잡아 묶어준다.
▲ 올해 가을에는 처음으로 텃밭의 빨간 고추를 말려 고춧가루를 만들어 보았다. 너무 작은 양이지만, 고추농사의 노고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어주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황의충 동네정미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