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종(亡種)에서 하지(夏至)까지는 눈코 뜰 새 없는 농번기였다. 새벽녘이면 밭에 김을 매고 아침 전에 북주기까지 서둘러 마쳐야 했다. 해가 길어지니 일은 더욱더 바빠졌는데 이슬이 걷히자마자 농사일을 재촉하는 움직임으로 마을이 술렁거렸다. 들판 여기저기서 못 줄잡이의 줄넘기는 소리에 맞춰 모내기로 시끌벅적했고 새참이며 점심을 만들어 나르느라 집집마다 일손이 부족해 코흘리개 아이들까지 모두 동원되었다. 오뉴월 하루 놀면 동지섣달 열흘 굶는다 했으니 하루도 허투루 보낼 날은 없었다.
이 바쁜 농번기에 식구들 끼니며, 돌아가며 농사일을 도와주는 울력 일꾼들의 식사까지 챙겨야 하는 어머니의 노동은 더 고되 보였다. 물에 젖었다 흙에 젖었다를 번갈아 하는 사이에 어머니의 손은 갈라지고 터져나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햇볕이 더 뜨거워지는 만큼 농사일도 고단해졌지만 빠트리지 않고 준비하는 게 바로 오이지 담그기였다. 오이 한 접을 깨끗이 씻어 항아리에 차곡차곡 넣고 소금물을 끓여 부어주었다. 1차 숙성이 되면 다시 소금물을 끓여서 이번에는 식혀서 부어주기를 반복하고 나면 넓적한 돌로 눌러주고 맛이 들기를 기다렸다.
▲ 여름을 대표하는 채소 오이
오이지가 식탁에 오르면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뜨거운 국, 찌개의 자리를 시원한 오이지가 대신했다. 동글동글 잘라서 갖은 양념으로 무침을 하기도 했지만 우리 집은 이런 무침보다는 물을 붓고 다진 마늘, 송송 썬 파와 식초를 조금 친 물오이지를 주로 먹었다. 어머니의 갈라 터진 손바닥 사이로 스며든 소금물이 얼마나 따가웠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지만 찬으로 오른 물오이지로 한 여름을 지낼 수 있었다.
오이지는 언제부터 먹게 되었을까? 삼국시대에도 오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으니 우리가 오이를 재배하고 음식으로 먹은 역사는 꽤 오래전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지금처럼 소금물에 절이는 오이지가 기록되어 있다. 오이지를 절이는 어머니의 노동도 꽤나 오랫동안 이어져 그 맛이 더 깊어진 모양이다.
1년생 초본인 오이는 저온성작물이기 때문에 아직 한기가 다 가시지 않은 초봄부터 쑥쑥 자라기 시작해 5월 중순이면 본격적인 수확이 가능하다. 시설재배가 보편화된 덕분이지만 백다다기 오이는 4월 중하순부터는 수확이 가능해 오이지에 많이 이용된다. 백다다기 오이는 청오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흰색을 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한 고온에서는 성장이 멈추기 때문에 한 여름에는 청오이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덩굴식물인 오이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덩굴손이다. 오이를 키워보면 줄기와 잎 말고도 덩굴손이 자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가느다란 줄기 같지만 끝부분이 동그랗게 말려있어 제법 억척스럽게 손을 꼭 쥐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지주대를 세워주고 오이망을 설치해 주거나 끈을 묶어주면 오이는 이 덩굴손을 뻗어 지주대에 묶인 끈을 붙잡고 위로 오른다. 더 많은 햇빛을 받고 살아남아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다.
▲ 하늘을 향해 뻗어 올린 오이의 덩굴손
사실 이 덩굴손은 잎과 곁가지가 오이의 성장을 위해 변형된 것이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옥신(auxin)이라는 식물 호르몬 성분이 이 여리여리한 덩굴에 비대칭으로 분포하기 때문에 돌돌 말리게 된다고 한다. 앞뒤 또는 좌우의 한쪽에 이 성분이 더 많고 한쪽에는 적기 때문에 도르륵 말리게 되어 마치 손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덩굴손은 옥신의 분포, CO2, 마찰 등에도 반응하지만 특히 햇빛에 더 많이 반응한다. 온도가 높고 햇볕이 내리쬐면 높고 멀리 덩굴손을 뻗어 올리고 지주대를 더 힘 있게 돌돌 말아 잡는다. 온도와 광도에 따라 접촉선회운동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 유인줄을 붙잡은 덩굴손
날이 뜨거워지고 해가 더 내리쬐어도 덩굴손은 이를 피하지 않는다. 어쩔 때는 하늘에 헛손질을 하기도 하지만 기어코 지주대를 붙잡고 만다. 덩굴손의 헌신으로 오이는 원 줄기를 더 튼튼히 지주대에 붙이고 잎은 더 많은 햇빛을 머금을 수 있게 되었다.
노란 오이꽃에 어린 열매가 매달리면 덩굴손은 더욱더 힘을 모아 제 손을 말아 쥐고서 오이를 키워낸다.
▲ 오이꽃에 달린 어린 오이와 덩굴손
<초보 도시농부들을 위한 오이 재배법>
● 덩굴식물이므로 필히 지주대와 유인줄을 설치해 주어야 한다. 어느 정도 크기가 있는 텃밭이 아니라 화분이나 작은 텃밭이라면 지주대를 삼각형으로 세우고 주변을 둘러 유인줄을 매준다.
● 오이에서 쓴맛이 나는 이유는 질소 거름이 너무 많거나 저온 다습하기 때문이다. 균형 있는 거름주기를 해주고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심어주면 좋다.
● 덩굴식물의 자라는 모습을 ‘마디’ 가 자라는 것으로 표현하는데 한마디는 줄기에서 잎이 나오고 줄기가 조금 자란 후 다시 잎이 나오는 구간을 말한다. 검색을 통해 ‘다섯 마디 아래 곁순을 제거해 준다.’ 등의 표현을 볼 수 있는데 조금씩 따라 해 보면 작물 키우기를 공부해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 꽃을 감상하거나 농사를 배워가는 재미도 도시농부의 일상이다. - 노란 오이꽃
황의충 동네정미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