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시절에는 절대 먹지 않는 채소가 있었다. 특유의 물컹거리는 식감에다가 입안에서 미끌 거리는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시각적으로도 반짝거리는 형광 보라색이 이 채소를 기피하는데 한몫 더 했다. 지금이야 채소의 고유한 보라색들이 안토시아닌과 다양한 항산화 물질을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다고 해서 각광받고 있지만 건강을 위해 채소를 챙겨 먹는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는지 이 길쭉한 보라색 열매는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 들어 지금은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키우는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 가지 모종 한두 개만 심어도 여름 내내 집에서 필요한 가지를 수확할 수 있다.
햇볕이 쨍쨍한 한 여름부터 나뭇잎이 붉게 물드는 가을까지 텃밭에는 늘 가지가 열렸다. 이 가지는 신기하게도 여러 번 수확을 해도 늘 주렁주렁 열매가 매달려 있었다. 가지 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우리 집 밥상에는 늘 가지 무침이 올라왔다. 어머니는 밥을 지을 때 길쭉하게 네 등분한 가지를 얹어서 쪄낸 후에 간장, 마늘, 깨소금, 파 같은 갖은양념으로 무쳐서 상위에 올리셨는데 어린 내 입맛에 맞는 반찬이 아니어서 늘 젓가락으로 밀어내곤 했었다.
20대에도 사정은 비슷했다. 잠깐 인턴인지 실습 인지로 한여름 내내 출근했던 과천 정부종합청사 구내식당에는 늘 냉국이 나왔는데 어제는 가지냉국, 내일은 오이냉국, 모레는 다시 가지냉국 같은 식이었다. 주위 상사들의 눈치가 있으니 배식 받은 밥을 다 먹기는 했지만 이 물컹거리고 미끈거리는 보랏빛 채소는 나와는 영 안 맞는 것 같았다.
극적인 반전은 직접 텃밭농사를 짓기 시작한 10여 년 전부터였다. 5월이면 모종상에 가서 열매채소 모종을 샀는데 이유는 명확지 않지만 일단 고추, 오이, 그리고 가지를 먼저 집어 들었다. 마치 이 세 가지 채소는 의무적으로 키워야 하는 듯이 말이다. 그러고는 여름철에 부쩍 자라버린 가지를 별 기대 없이 몇 개를 수확했다. 이건 왜 꼭지에 가시가 있는지 손가락을 콕콕 찔려가면서 말이다. 어머니가 해주시던 데로 쪄서 무치는 건 귀찮고 해서 그냥 숭덩숭덩 잘라서 팬에 기름 살짝 두르고 구웠는데 이런! 깜짝 놀랐다.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과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가지만의 단맛. 가지가 이렇게 맛있는 채소였다니.
가지가 맛있어진 이유는 분명치 않다. 가지무침 일색에서 굽거나 볶거나 하는 레시피가 더 생겨나긴 했지만 가지 맛이나 식감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너도 나이가 들면 이 가지가 맛있게 느껴질 거라는 그때의 어머니 말씀이 맛있어진 유일한 근거다. 특히나 텃밭에서 바로 수확해서 먹으면 더 맛있다. 따자마자 생으로 한입 베어 물어도 맛있다. 다만 가지에는 솔라닌이라는 성분이 있어 생으로 먹으면 배앓이를 한다니 권하진 않는다.
▲ 가지꽃은 관상용으로도 훌륭하다.
우리나라는 가지의 쓰임새가 무침이나 나물, 냉국으로 한정적이지만 외국에서는 좀 더 다양하게 조리된다. 중국은 기름에 볶거나 튀기는 가지 요리가 많은데 이렇게 하면 가지의 단맛이 더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가지를 튀겨서 소스를 더해 먹는 ‘어향 가지’가 대표적이다. 중국어로는 가지를 ‘가자 (茄子)’라고 하는데 이 발음이 변해 우리나라에서는 가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일본은 가지를 ‘나스 (ナス)’라고 부르는데 지역별도 모양도 다르고 조리법도 차이가 있다. 일본의 부엌이라고 부르는 교토에서 생산되는 특산품 가지인 ‘카모 나스’는 크고 동그란 공처럼 생겼다. 이 가지의 중간을 잘라 된장을 발라 구워낸 ‘나스 텐카쿠’를 자주 먹는다. 오사카에서는 우리말로 물가지라고 해석되는 수분이 아주 많은 ‘미즈 나스’가 상에 오를 때를 본격적인 여름으로 친다.
서양에서도 가지는 여러 가지 식재료로 사용된다. 가지를 영어로는 ‘에그 플랜드 (Eggplant)라고 하는데 길쭉하게 개량된 우리나라 가지와 달리 커다랗고 동그란 모습이 이름처럼 계란을 닮았다. 이탈리아에서는 치즈를 얹어서 구워 먹는데 쫄깃하고 달달한 풍미가 좋다. 스페인에서도 동그랗게 잘라서 튀겨낸 가지를 먹는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가정식인 ’라따뚜이 (La ratatouille)‘에도 가지가 듬뿍 들어간다.
▲ 일본 코토의 특산품 가지 ‘카모나스’ (이미지 출처 - 사단법인 교토 농산품 협회 블로그)
신기한 것은 세계 여러 나라 공통적으로 청소년들은 가지의 식감을 싫어하고 잘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 때 가지 고유의 단맛과 식감이 순식간에 좋아지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살이의 맛을 알게 되면 채소의 맛도 바뀌는 것인가.
올해도 5월의 하늘은 눈부시고 화창하다. 가지는 맑은 날을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 가지를 심으러 나가보자.
<초보 도시농부들을 위한 가지 재배법>- 가지는 땅 온도가 17도 이상이어야 뿌리 내림이 좋다. 모종이 일찍 나온다고 일찍 심으면 낭패를 볼 수 있다. 서울 기준, 5월 초에서 중순이 모종을 심을 시기.
- 주말에만 수확할 수 있는 조건이라면 좀 작은 크기의 가지를 수확해도 무방하다. 한 여름에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데 일정 크기가 되면 너무 단단해지고 맛이 떨어지기 때문.
- 요즘은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다양한 가지 요리 레시피를 얻을 수 있다. 가지를 즐기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보면 가지 키우기가 더 재미있어진다.
황의충 동네정미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