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의 농부들: 후쿠시마와 희망'('陽なたのファーマーズ フクシマと希望') ©서울농부포털2011년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 폭발 사고 이후, 사고의 전후를 다룬 수많은 기록물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에 관한 다양한 관점과 해석에 대한 여러 갈래의 주제의식을 가지고 만들어진 작품들을 보고 나서도, 우리는 여전히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여 분노와 우울만 남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최근 전혀 다른 관점으로 사고 이후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이 한국의 관객들을 찾았습니다. '햇볕의 농부들: 후쿠시마와 희망'('陽なたのファーマーズ フクシマと希望')입니다.

하인리히 뵐 재단 동아시아사무소가 9월 17일(목) 서울 마포구 '망원정X'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햇볕의 농부들: 후쿠시마와 희망'의 상영회를 열었다. ©서울농부포털영화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고 이후, 오염된 땅에서 다시 농사를 시작한 사람들을 따라갑니다. 중심인물은 원전에서 북서쪽으로 약 70km 떨어진 후쿠시마현 니혼마쓰시의 콘도 케이 씨입니다. 유기농업을 하던 콘도 케이 씨는 사고 이듬해인 2012년 농사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이미 거둔 쌀은 스스로 처분해야만 했고, 전기와 기름 공급이 끊겨 농기계도 쓸 수 없었습니다. 사고는 모든 것을 뿌리째 뽑아갔습니다. 이 막막함은 먹거리뿐 아니라 에너지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선택한 방법은 농지 위에 태양광 패널을 세우고 그 아래에서 작물을 키우는 영농형 태양광, 이른바 '솔라셰어링'이었습니다.
후쿠시마에서 솔라셰어링 농장을 일구고 있는 간노 유키, 콘도 케이, 쓰카다 하루 ©'햇볕의 농부들: 후쿠시마와 희망' 예고편 갈무리콘도 케이 씨는 농업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쓰카다 하루 씨, 30대 중반에 농사를 시작한 간노 유키 씨 같은 젊은 농부들과 함께 솔라셰어링 농장의 모습을 갖춰 나갔습니다. 카메라는 2023년 5월부터 1년 8개월 동안 태양광 패널 아래에서 쌀과 포도, 밀, 겨자, 들깨, 당근을 키우고 소를 방목하며 다양한 형태의 농업을 일으키는 이들의 도전과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전기 판매로 안정적인 수입이 생기면 농부가 더 좋은 작물을 고민하고 젊은 농부를 받아들일 여유도 생긴다고 말합니다. 솔라셰어링이 핵이 없는 에너지 문제와 쌀농가의 낮은 소득, 농업인 고령화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솔라셰어링 농장 모습 ©'햇볕의 농부들: 후쿠시마와 희망' 예고편 갈무리

'햇볕의 농부들: 후쿠시마와 희망'에서는 솔라셰어링 농사와 함께 사고 이후 오염된 흙의 저장과 이동 과정을 보여주는 등 후쿠시마의 상황을 보여주고, 핵발전소 가동을 막는 판결을 내린 히구치 히데아키 전 재판장이 직접 출연해 당시 판결문을 읽는 등 현재 일본의 핵발전과 에너지 문제도 이야기하고 있다. ©'햇볕의 농부들: 후쿠시마와 희망' 예고편 갈무리
오바라 히로야스 감독이 '햇볕의 농부들: 후쿠시마와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30년 넘게 TV 광고 감독으로 일한 오바라 히로야스 감독은 이 영화를 "등장인물 전원이 멋있는 영화"라고 소개하며, 한국에서 상영회가 더 많이 열리고 더 널리 알려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서울농부포털영화 상영 후 오바라 히로야스 감독은 "분노나 슬픔은 미래를 열 수 없다"며, 사고 피해의 현실을 전하면서도 재생 에너지를 함께 다뤄 관객들이 희망을 가지고 나가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영화가 작아도 세상을 바꿀 힘이 있다고 믿는다"고 전한 오바라 히로야스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 나온 학생들을 예로 들었습니다. 감독의 전작 영화들을 보고 스스로 농장을 찾아온 국제기독교대학교의 두 여학생은 일주일 간의 농장 생활을 경험한 후, 더 많은 친구들을 데리고 다시 돌아와 2박 3일간의 농업 체험을 했습니다. 오바라 히로야스 감독은 "작은 일이라도 마음이 움직이면 행동이 이어진다"며 "작은 일이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고, 이것이 영화의 힘"이라고 말하고, "이 자리에서 영화를 보신 여러분들이 무언가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면 너무 기쁘겠다"고 전했습니다.
상영회에서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되고 있다. ©서울농부포털이어진 '관객과의 대화'에서는 농장 서포터즈 운영과 일본 정부 정책에 관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콘도 케이 씨의 솔라셰어링 농장은 서포터즈를 모집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서포터즈로 등록하면 포도나무 한 그루의 1년 주인이 되어 이름을 걸고 수확물을 받습니다. 오바라 히로야스 감독은 영화의 공개 시기와 서포터즈 모집 시기가 맞아 덕분에 모든 구좌를 완판 시켰다고 전했습니다.
솔라셰어링의 정책에 관해서는 "일본의 규제는 지금도 엄격하지만 앞으로는 더 엄격해진다"고 말했습니다. 오바라 히로야스 감독은 "정부의 정책이 태양광도 농사도 제대로 하라는 취지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패널 아래 농사의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오바라 히로야스 감독은 "이런 정책은 문을 자꾸 좁게 만드는 정책"이라며, "잘하는 곳을 더 잘하게 돕기보다 나쁜 것을 어떻게 제한할 지에 집중하는 일본식 규제의 전형"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일본 농민들이 솔라셰어링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질문에는 "아직은 농지 위 패널이 제대로 된 농사를 어렵게 한다고 생각하는 농부가 많다"고 답했습니다. 다만 이상 고온이 심해지면서 햇빛보다 그늘에 관심을 두는 농부가 늘고 있다고 전하며, "아직 이해가 깊지 않을 뿐이며, 이해가 넓어지면 더 확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사고 이후 핵에 관한 정책에 있어 일본 정부를 믿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오바라 히로야스 감독은 "믿으면 안 됩니다"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정부가 원전을 늘리고 싶어 하고, 후쿠시마 사고를 대단치 않은 일로 여기게 만들려 한다는 것입니다. 중간저장시설의 오염된 흙이 아무 논의 없이 녹지 조성에 쓰이고, 오염수를 내보내면서도 어업인과 협의하지 않는 점을 근거로 든 오바라 히로야스 감독은 "일본 정부의 대외적인 말에는 거짓말이 많고 독단적인 것이 많다"고 전했습니다.
상영회에서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날 '관객과의 대화'는 '햇볕의 농부들: 후쿠시마와 희망'의 자막 번역을 맡은 장혜영 작가가 진행했다. ©서울농부포털'햇볕의 농부들: 후쿠시마와 희망'은 핵발전소 사고를 '피해의 기록'에서 멈추지 않고 '회복의 이야기'로 이어 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영화는 오염된 땅을 떠나지 않고 농사와 에너지를 함께 일구는 사람들을 통해, 먹거리와 전력을 스스로 마련하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또, 영농형 태양광이 농가의 소득을 지키고 젊은 농부를 불러들일 수 있다는 가능성과 함께, 현실의 규제가 풀어야 할 과제도 짚습니다. 영농형 태양광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우리나라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분노와 슬픔 대신 희망이 사람을 움직인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농장을 찾은 학생들처럼, 작은 울림이 행동으로 이어질 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햇볕의 농부들: 후쿠시마와 희망'이 우리에게도 그런 계기가 되기를 바라 봅니다.
©'햇볕의 농부들: 후쿠시마와 희망' 예고편 갈무리 김성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