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제5주택재개발정비구역의 한 골목. 출입금지 제한선 안쪽, 사람들이 떠난 자리를 자연이 채워가고 있다. ©서울농부포털재개발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떠나지만, 그들이 마당과 베란다에서 키우던 화분과 나무들은 종종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겨집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떠난 자리는 자연의 새로운 흔적과 기억으로 차곡차곡 덮이게 됩니다. 지난 8월 29일(토) 서울 은평구 불광역 인근 불광제5주택재개발정비구역에서는 이렇게 남겨지고 자라난 식물들에게 눈길을 건네는 특별한 산책이 열렸습니다. 재개발 구역의 유기식물을 구조해 온 프로젝트 '공덕동 식물유치원'이 기획한 "재개발단지 식물 투어"입니다.
백수혜 '공덕동 식물유치원' 원장과 김선영 활동가가 "재개발단지 식물 투어" 참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서울농부포털이번 투어는 오후 4시부터 5시 30분까지 총 1시간 30분에 걸쳐 사전 신청을 통해 모집된 참가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투어는 두 단계로 나뉘었습니다. 앞선 1시간 동안 참가자들은 재개발 예정 구역을 천천히 걸으며 골목 곳곳, 빈집 마당, 갈라진 담벼락 틈에 남아 자라고 있는 식물들을 관찰하고 필요한 경우 조심스럽게 구조했습니다. 이후 30분은 불광역 인근 카페로 자리를 옮겨, 참가자들이 산책하며 느낀 소감과 발견한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으로 채워졌습니다. 투어는 단순히 낯선 장소를 탐험하고 식물을 옮겨 심는 활동을 넘어, 사라지는 공간을 함께 목격하고 그 기억을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투어 참가자들이 불광제5주택재개발정비구역을 돌며 식물들을 살피고 있다. 1시간 정도의 투어 동안 자연스럽게 자라난 개똥쑥, 제비꽃, 까마중, 돌나물, 괭이밥, 환삼덩굴, 깨풀, 쇠무릎이, 망초, 역귀, 사대풀, 미국자리공, 명아주, 목련, 담쟁이, 버드나무, 댑싸리, 세시초, 배초향, 박주가리 등 다양한 식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서울농부포털'공덕동 식물유치원'은 운영자 백수혜 원장이 2021년 여름 서울 마포구 공덕동으로 이사한 뒤, 집 건너편 재개발 구역에서 이주민들이 두고 간 화분과 식물들을 목격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여기서 죽나 내가 키우다 죽이나"라는 마음으로 하나둘 데려오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이후 활동 반경은 공덕동을 넘어 연희동, 노량진, 흑석동 등 서울 곳곳의 재개발 구역으로 넓어졌고, 지금까지 국화, 알로카시아, 고사리, 돌나물 등 100여 개가 넘는 식물이 구조돼 새로운 주인을 만났습니다.
구조된 식물은 마당에서 회복 기간을 거친 뒤, SNS에 사연과 사진으로 소개돼 입양자를 찾습니다. 유치원이라는 콘셉트에 맞춰 식물들은 '친구들'로, 분양을 앞둔 식물은 '졸업반'으로 불리는 등 이름 붙이기에서도 애정 어린 시선이 묻어납니다. 이러한 활동은 『여기는 '공덕동 식물유치원'입니다』(백수혜 지음, 세미콜론)라는 책으로도 엮여 나왔습니다.






투어 참가자들이 식물들을 구조하고 있다. 김선영 활동가는 "구조한 식물들은 뿌리가 옮겨진 것이기 때문에 백 프로 살 수는 없다"면서도 "'버려진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서로를 보듬는다는 마음으로 옮겨가면 좋겠다"고 전했다. ©서울농부포털최근 '공덕동 식물유치원'의 활동은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혼자 재개발 구역을 돌며 식물을 구조하던 방식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걸으며 관찰하는 '재개발단지 식물 투어' 형태의 모임을 꾸준히 열어온 것입니다.
특히 이런 흐름은 최근 문을 연 온라인 플랫폼 '킨더플트'(
[KinderPLT.com])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킨더플트는 "버려지는 식물이 없는 도시"를 꿈꾸며 만들어진 위치 기반 식물 나눔·기록 플랫폼으로, 식물을 소모품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생명체로 존중하는 문화를 확산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용자는 지도를 통해 내 주변의 나눔 가능한 식물을 찾거나 돌봄이 필요한 식물을 제보할 수 있으며, "당신이 사는 곳이 곧 또 하나의 식물유치원이 된다"는 슬로건 아래 누구나 자신의 지역에서 '작은 식물유치원 선생님'이 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 플랫폼은 2025년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 "당신 옆의 공익활동 with" 프로그램의 지원으로 처음 만들어졌고, 2026년에는 카카오뱅크 에코임팩트 1기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시민 참여형 기록 플랫폼으로 한층 고도화되고 있습니다.
'킨더플트' 홈페이지 갈무리 ©KinderPLT'공덕동 식물유치원'은 SNS를 통해 "회색 도심의 공원과 화단, 길과 벽돌 틈에도 저마다 이름을 가진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며, 재개발 지역 식물의 사진을 찍어 킨더플트에 함께 기록해 보자고 제안한 바 있습니다. 이번 불광동 투어에서 참가자들이 걸으며 식물을 관찰하고 이야기를 나눈 경험 역시, 구조라는 '개입'을 넘어 사라지기 전 도시 식생의 모습을 시민들이 직접 지도 위에 기록해 나가는 킨더플트의 활동 방식과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었습니다.

투어 참가자들이 소감을 나누며 함께 목격한 감각을 이야기하고 있다. ©서울농부포털'공덕동 식물유치원'의 활동은 인스타그램(
[공덕동 식물유치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찾아서 함께 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킨더플트'(
[KinderPLT.com])에도 들러서 내 주변의 생명들을 함께 기록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재개발은 낡은 건물과 함께 그 자리를 지키던 초록빛 생명들도 함께 지워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그 식물들은 누군가 오랜 시간 물을 주고 가지를 다듬으며 키워온 존재이거나, 자연이 스스로의 숨을 틔워낸 증거이기도 합니다. '공덕동 식물유치원'의 식물 투어는 이런 식물들에게 마지막 눈길을 건네고, 가능하다면 새로운 삶을 이어주려는 작은 실천입니다. 여기에 더해 킨더플트라는 플랫폼은 한 사람의 구조 활동을 여러 시민이 함께 참여하는 기록과 돌봄의 관계망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재개발이 잇따르는 서울 곳곳에서, 이런 식물 투어와 시민 기록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지 기대해 봅니다.
©서울농부포털김성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