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27일(수) 혜화동에 위치한 '알파라운드'에서 작은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수준 높은 활동과 결과물의 울림이 공간을 가득 채웠던 전시, 청년이 청년의 먹거리를 챙기고 보듬는 '벗밭'의 연말정산 '감사와 인사'를 다녀와 보았습니다.
혜화동의 '알파라운드'에서 '벗밭' 연말정산 '감사와 인사' 전시회가 열렸다. ©서울농부포털'벗밭'은 '먹거리를 고민하는 벗들이 모이는 밭'이라는 의미로 건강한 식사 문화 플랫폼과 커뮤니티를 지향하는 회사입니다. 특히 '지속가능한 식문화를 알리고, 그 첫 경험을 함께 한다'는 핵심 문장을 가지고 청년들과 다음 세대의 먹거리 문제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청년의 먹거리를 고민하는 '벗밭'이 바로 그 청년이라는 점입니다. 백가영 대표가 '벗밭'의 시작을 이야기했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우연히 친구들과 먹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혼자 자취하는 친구들은 과일 하나 챙겨 먹기도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약간 충격이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친구들이랑 학교 안에서 건강하게 잘 먹고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외국 대학교에서 열리는 파머스 마켓을 보고 이거다 싶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는 본 적이 없었어서 우리가 한 번 열어보자 하고 친구들을 모았죠. 그게 2019년이었고, 그게 벗밭의 시작이었어요."
전시회에서 '벗밭'이 직접 제작한 다양한 상품들이 전시되었다. ©서울농부포털'벗밭'은 대학 친구들의 동아리 활동으로 시작되었고, 지금은 어엿한 주식회사가 되었습니다. '백가영 학생'은 '거창하지 않게 그냥 정말 먹는 것'에 꽂혀서 활동을 하다 보니 어느새 '백가영 대표'가 되어 있었습니다.
"막 '환경을 지켜야 된다' 아니면 '농업이 중요하다' 이런 큰 이야기에서 시작한 게 아니었고, 그냥 먹는 게 좋고 잘 먹어야 될 것 같고 이런 생각이 들어서 시작했던 건데, 졸업 즈음해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좀 더 깊이 있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아예 업으로 삼기로 했어요. 졸업하자마자 작년 여름 창업을 했는데 다행히 나름 잘 꾸려지고 있는 것 같아요. 올해 목표가 '지원 사업받지 않고 자립하기'였는데 어느 정도 이루기도 했고요."
백가영 대표가 또래의 먹거리 문제를 꾸준히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건강한 식사에 대한 공감대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활동을 하면서 만났던 친구들의 목소리에 힘을 얻어서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저희가 첫 번째 파머스 마켓을 열기 전에 대학생들 대상으로 '끼니 만족 설문조사'를 진행했었는데 '당신이 바라는 끼니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요?'라는 질문의 답에 가장 많이 나온 단어가 '건강'이었어요.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건강한 식사를 원하고 있다는 걸 확인했던 거죠. 건강이란 게 좁게 보면 영양이나 질병과 연관된 신체적인 건강일 것이고, 넓게 보면 환경이나 동물권 같은 사회적인 건강까지 생각할 수 있을 텐데, 저희는 몸이든 사회든 건강을 위한 시작으로 '나와 가까운 먹거리'를 '알고 먹는 것'을 제안하고 싶었어요."
제작한 상품 중 달력은 '일 년'이라는 유통기한 때문에 이면지 공책으로 새활용되었다. ©서울농부포털올해 '벗밭'은 '알고 먹는 것'을 위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먼저 매달 모여 제철 식재료들을 탐험하듯 먹어보며, 그 재료들의 생산 과정과 정보를 알리고 그와 연관된 환경 등의 이야기까지 전달하는 '즉흥과일클럽'과 '즉흥채소클럽'을 운영했습니다.
"1인 가구 청년들을 주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었어요. 혼자 살면 채소, 과일 챙겨 먹기가 어려운데 분명 원하는 친구들은 있거든요. 함께 모여서 먹는 것뿐만 아니라 그때그때 작물 설명도 하고, 제철 음식의 의미도 알려주고, 그 작물을 생산한 농부님들 이야기도 들려줬어요. 알고 먹으면 더 맛있는 법이기도 하고, 또 더 궁금해지기도 하잖아요. 그렇게 될 때 농업에도 관심을 가지고 환경 문제까지도 연결을 시킬 수 있을 것 같아서 많은 준비를 했고, 올해 22번 정도 진행되었어요."
전시회에서 '즉흥과일클럽'과 '즉흥채소클럽'의 활동 모습과 프로그램 진행 중에 사용된 제철 음식에 대한 설명지가 전시되었다. ©서울농부포털지속가능한 식문화를 직접적으로 알리기 위한 교육 사업도 진행했습니다. 초∙중∙고∙대학 각급 학교부터 일반 성인들까지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먹거리 환경에 대한 인식을 가지게 하는 활동을 진행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먹거리에 대한 인식을 가지게 하려면 어렸을 때부터의 교육이 중요하기 때문에 학교의 자유학기제나 특강 등을 통해서 먹거리 수업을 진행했어요. 직접 제작한 씨앗 키트나 그리기 활동 재료를 통해서 실습을 하기도 하고, 함께 농촌 활동을 가기도 하고요. 교실을 벗어나기 어려운 경우에는 온라인으로 농부님들과 미팅을 하면서 우리가 먹는 것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리는 데 중점을 뒀어요. 대학생들 같은 경우는 올해 거창에 있는 친환경 사과 농장으로 농활을 가서 일도 하고 인근 포도밭의 와이너리도 가보면서 팜 투 테이블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어요. 직접 체험을 통해 사과를 먹기 위한 전 단계가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참가한 대학생 친구들뿐만 아니라 저희들에게도 꽤나 큰 의미가 된 것 같아요."
전시회에서 교육 사업의 활동 모습과 직접 제작한 교육 키트 등이 전시되었다. ©서울농부포털'벗밭'에서 교육기획을 담당하고 있는 배기현 씨가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벗밭교육 과정 속 대학생들의 농활 모습 ©벗밭식문화 기획 사업으로 충남 청양군과 함께 향토 음식 문화를 기록하고 알리는 '청양 손맛 기록단'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청양군 곳곳의 어르신들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어떤 거 드셨는지 여쭙고 음식들을 발굴해서 그중 청양을 대표할 만한, '여기서만 먹을 수 있다'하는 특별한 것들을 선정해서 레시피북으로 제작했어요. 지역 축제 때 저희가 직접 레시피대로 만들어서 주민분들께 대접해 드렸는데 옛날에 먹던 그 맛이 돌아왔다고 너무 좋아들 해주셨어요. 가죽나물 같은 경우는 지금은 거의 먹지 않아서 잊힌 식재료인데 레시피북을 통해서 다시 발굴되다시피 했어요. 잊힌 것을 찾아내고 작은 것을 알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던 프로젝트였어요. 더불어서 이런 활동들이 다품종 소량 생산의 농부님들에게도 조금이나마 응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됐고요."
전시회에서 '청양 손맛 기록단' 프로젝트를 통해 제작된 레시피북이 전시되었다. ©서울농부포털'청양 손맛 기록단' 활동 중 직접 음식의 레시피를 배우고 있는 모습 ©벗밭매년 진행하고 있는 파머스 마켓은 올해 '찾아가장'이라는 이름으로 무포장, 무배송을 원칙으로 하는 픽업 형식의 장터로 운영되었습니다.
"올해 파머스 마켓은 비대면으로 배송하는 형태를 계획했는데, 저희는 주로 청년들을 만나고 있고 대부분 1인 가구인 경우가 많아 소량 포장일 수밖에 없다 보니 포장재가 너무 많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최대한 일회용품을 쓰지 않으려고 저희가 농부님들로부터 한 번에 받아서 중구, 종로구, 관악구, 마포구의 중간 지점으로 직접 찾아가 소비자들이 픽업하는 방식으로 진행했어요."
또 채식을 하는 청년들에게 채소 바구니를 선물하는 '무빙 베지 바스켓' 등의 활동도 펼쳤는데, 이런 활동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바로 레시피를 함께 전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가장 고민하고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이 a/s에요. 좋은 먹거리를 판매하고, 함께 먹고,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도 좋지만 어떻게 먹을 것인가를 알려주고 직접 해 먹을 수 있게 해야 실제 삶에 녹아들 수 있게 만드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늘 레시피를 제작해서 농산물과 함께 제공하고 있고, 따로 매거진이나 영상 콘텐츠도 제작해서 배포하고 있어요."
전시회에서 파머스 마켓 '찾아가장'의 활동이 전시되었고, 현장에서 제주 자연농 귤과 구좌 당근이 판매되었다. ©서울농부포털전시회에서 활동 중에 사용된 레시피 설명지와 매거진이 전시되었다. ©서울농부포털'벗밭'은 올해 먹거리 고민의 끝에 결국 텃밭을 일구기도 했습니다.
"먹거리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농사를 짓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잖아요. 더군다나 '알고 먹는 것'을 고민하는 입장에서 농사는 그 시작점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자신이 없었어요. 꾸준히 농장에 가서 일을 경험하면 할수록 농사라는 게 그냥 사람들이 '농사나 지어야지'라고 할 때 그 농사가 아니더라고요. 정말로 기술과 노력과 부지런함이 필요한 일이어서 우리가 가능할까 싶었어요. 그러다가 올해 초에 우연한 기회로 쓸 수 있게 된 땅이 생긴 거예요. 그렇다면 한 번 농사를 지어봐야겠다 해서 친구들을 모았고, 11명 정도의 인원이 '풀밭'이라는 이름으로 텃밭을 시작했어요."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해보는 농사는 처음이었던 '풀밭'은 농사하며 공부하며 몇 달을 도시농부로 살았습니다.
"농사는 처음이라 홍성의 청년 유기농 농부님께 온라인을 통해 격주로 농사를 배웠어요. 농사짓던 땅이 아니어서 풀도 무성했고, 토질도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만 우선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보자 하고 우당퉁탕 농사였지만 즐겁게 지었어요. 저희 목표가 많은 작물을 거두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좀 편하게 접근할 수 있기도 했고요. 그래도 초보 농부들이 한 것 치고는 상추며, 고추며, 옥수수며 꽤 괜찮았던 것 같아요. 텃밭이 푹 꺼진 지형이었는데 주변 아파트와 주택에서 다 내다보이는 구조였어서 주민분들이 엄청 관심 가져주시고, 씨앗도 나눠주시고 해서 이웃의 따뜻함도 느낀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전시회에서 '풀밭'의 활동과 그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가 전시되었다. ©서울농부포털텃밭 부지가 사유지여서 채 한 해 살이를 채우지 못한 농사였지만, '풀밭'은 잠깐이나마 도시 속에서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가 되는 경험을 주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팜 투 테이블을 실현해 볼 수 있었고, 동료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텃밭을 매개로 하는 지역 공동체의 가능성을 느껴봤던 경험이었어요. 물론 실제로 농사를 지어보니 생각보다 더 힘들다는 것도 알게 되어서 역시 농사는 전업으로 해야 하는가 싶기도 하더라고요. 그래도 '벗밭'의 멀지 않은 목표 중에 식탁이 같이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게 있는데, 그때는 아마 밭도 한편에 있을 것 같아요. 큰 밭은 아니더라도 농사를 통해 일정 부분 자급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어요."
'풀밭'의 텃밭 활동 모습 ©벗밭'벗밭'은 새해 목표를 식문화 활동가 양성과 다른 단체들과의 협업 강화를 통한 건강한 식사 문화 커뮤니티의 기초 다지기로 꼽았습니다.
"내년에는 기존의 교육 사업을 좀 더 정례화하고, 거기에 더해서 활동가 양성 과정 아카데미를 새롭게 개발할 계획이에요. 저희뿐만 아니라 식사나 먹거리에 관심 있는 분들 하나하나가 주체가 되길 바라거든요. 그런 분들에게 교육을 제공하고 나아가서는 강사 등의 활동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또, 다른 농부 시장의 농부님들과 함께 '즉흥과일클럽'을 진행한다거나 다른 청년단체들과 결합한 '밥상회'를 만드는 등의 협업을 통해서 식문화에 대한 좀 더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더 다양한 사람들과 연결되고 함께 하는 커뮤니티의 발판을 다지는 프로젝트를 기획해 보려고 해요."
'벗밭' 사훈 제1조 '밥부터 먹자' ©서울농부포털백가영 대표는 향후 '벗밭'의 방향에 대한 질문에 '더 쉽고 만만하게 가겠다'는 답을 했습니다.
"이게 40-50대 어른분들께 말씀을 드리면 '먹는 게 중요하다', '먹는 게 곧 나다' 이런 이야기에 너무 공감을 많이 해주시는데, 젊은 층들은 정말 큰 계기가 있기 전까지는 먹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기도 힘든 것 같아요. 건강한 먹거리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에게 건강한 먹거리에 대해 이야기해야 되는 거니까 이 부분이 저희의 가장 큰 고민인데, 그래서 가능한 쉽고 또 쉽게 가야 할 것 같아요. '벗밭' 활동을 하고 3년째 즈음부터는 더 진척되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 환경이나 기후위기에 대한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던져 보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어렵더라고요.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먹거리', '환경을 생각하는 채식' 이렇게 사람들을 모집하는 것과 '과일 먹기 모임'으로 모집하는 것과 사람들의 부담감이 다르다는 게 확실히 느껴졌어요. 결국 저희의 핵심 문장인 '지속가능한 식문화를 알리고, 그 첫 경험을 함께 한다'가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이야기로 남지 않으려면 저희가 모르는 사람들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하고, 더 쉽고 만만하게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문턱을 낮춰서 친구들과 고민의 시작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벗밭'. 왼쪽부터 교육기획을 담당하고 있는 '뜨거운 감자' 배기현 씨, '첫째 펭귄' 백가영 대표, 홍보를 담당하고 있는 '소문난 맛집' 박한솔 씨. ©서울농부포털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어찌 된 일인지 마음속에 한동안 잊혔던 편안함과 설렘의 감정이 찾아 들어왔습니다. '벗밭'이 보여준 완성도 높은 작업들에 왠지 모를 경이로움까지 느껴지던 와중에, 김초엽 작가의 「지구 끝의 온실」의 한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희망을 발견한 거야"
'벗밭'의 활동은 SNS(
[벗밭 인스타그램])나 홈페이지(
[butground.com])를 통해 만나볼 수 있습니다. 희망을 찾는 분들이 계신다면 꼭 한 번 들러 함께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성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