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구는 북한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자연녹지가 풍부한 자치구이다. 그래서 휴일에는 많은 등산객이 은평구를 찾는다. 하지만 도시 안에 공원이나 녹지가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생활 속에서 자연을 마주하며 여유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르신들이 잠시 머물며 쉬거나,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다니며 놀만한 곳이 부족했다. 구 안에서 도시농업은 생각하기조차 어려웠다.
2015년 그린벨트 부지를 활용해 향림도시농업체험원(이하 체험원)이 개장하며 큰 변화가 찾아왔다. 산책하기 좋고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은 도시농업 공간이 생긴 것이다. 훼손되어 가는 그린벨트 보전에서도 최선의 방안이었다. 삭막한 도심에 숨통이 트이자, 텃밭 경작과 녹지 부족에 목말랐던 많은 시민이 체험원을 찾아왔다. 많은 사람이 자연을 찾는 봄. 체험원 개장과 함께 은평구에 전에 다른 새로운 봄이 활짝 피었다.
매년 찾아오지만 늘 새로운 봄. 체험원의 봄은 더욱 새롭다. 4월 27일 찾아간 체험원 정원에는 나무와 화초마다 화려한 꽃과 잎이 돋아나고, 텃밭에는 파릇파릇한 채소가 자라 체험원 전체가 푸른 옷으로 단장을 했다. 각각이 아름다움과 자연의 생동감을 뽐내는데, 전체가 조화를 이루어 한 폭의 수채화 같다. 이런 조화는 도시에서 자연의 힘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리라. 사람의 많은 손길이 닿았으리라. 곳곳에 주황색 작업 조끼를 입은 사람들의 움직임이 부산하다. 양봉장을 향해 비탈을 오르는 발걸음. 군데군데 난 풀을 뽑는 부지런한 손길. 체험원을 가꾸는 ‘멘토(mentor)’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체험원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을 멘토라고 부른다. 그들의 손길이 닿아 체험원의 봄은 더욱 새롭다.
“육묘장에서 일하시는 박찬옥 선생님은 씨앗으로 모종을 키워서 텃밭을 경작하는 농부들에게 나눠주시죠. 선생님은 거의 일주일 내내 나오시는 것 같아요. 정혁기 선생님은 논을 담당하고 계세요. 전에는 경운을 해서 벼를 키웠는데 요즘엔 무경운 벼농사를 하세요. 땅속에 탄소를 가둬서 지구온난화를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서죠.”
체험원에서는 양봉장, 정원, 육묘장, 텃밭, 논, 교육장 등 다양한 구역이 있다. 은평구 주민들은 각 구역에서 멘토의 도움을 받아 다채로운 도시농업 활동을 하고 있다. 2022년 4월 서울농부포털 ‘이달의 서울농부’로 선정된 이윤경 씨도 멘토단의 일원이다. 그가 현재 맡은 일은 체험원 홍보다. 은평구도시농업지원센터 홈페이지와 밴드를 관리하며 체험원의 소식을 알리고 있다. ‘이달의 서울농부’로 선정된 그의 인터뷰 기사를 쓰겠다는데, 자신보다 체험원 홍보와 다른 멘토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였다. 자신의 직함에 너무나 충실하다. 그런 모습에서 그가 체험원과 동료 멘토들에 대해 얼마나 많은 자부심을 느끼고 신뢰를 하는지가 엿보였다. ‘이달의 서울농부’는 체험원 위탁을 맡은 ‘S&Y도농나눔공동체’의 멘토 모두에게 돌아가야 했던 것 같다.
“50세 이상의 분들이 사회공헌을 하러 오세요. 정원도 함께 가꾸고, 체험원을 같이 관리하는 거죠. ‘모두와 나눔’ 멘토라고 있는데, 저기 있는 ‘나눔 텃밭’을 관리하시는 분들이죠. 채소를 길러 지역의 소외계층들과 나누는 활동을 하세요. 체험원은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어요. 텃밭, 논, 정원, 육묘장 등. 사회공헌을 하시는 분들이 멘토의 역할을 맡아 각 구역을 나누어 맡아 관리하죠.”
멘토들은 절대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자원봉사를 한다. 이윤경 씨도 일주일에 3일을 체험원에 온다고 한다. 아침 9시에 나오고, 자녀들의 저녁밥을 준비하기 위해 오후 4시 정도에 귀가한다. 집안일까지 마치고 저녁이 되면 녹초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무런 대가 없이 이곳에 오는 이유는 다른 멘토와 같은 이유에서다. 삭막한 도시에서 의지할 수 있는 자연이 좋기 때문이다.
“집에 있으면 건물밖에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여기 오면 자연이 있어요. 전에는 직장생활로 피곤해 주말에는 집에서 푹 쉬어야 할 남편을 졸라 교외로 나갔어요. 그런데 여기 오고부터는 그런 말이 없어졌어요. 남편이 ‘어디 가야 하는 거 아니야!’ 하고 물어보면 안 가도 된다고 이야기해요. 평일에 여기서 다 보고 가지 일부러 자연을 찾아서 갈 필요가 없게 되더라고요. 여기 오면 힐링이 되고, 녹색을 마음껏 보고 가니까 여행을 가고 싶은 욕심이 많이 사라지더라고요. 여기 오시는 멘토들이 모두 그래요. 여기 오면 다 밝고 건강하고, 잘 아프지도 않으시는 것 같아요.”
육묘장을 관리하는 박찬옥 멘토(왼쪽)와 함께
아름다움 뒤에는 많은 이들의 땀이 있다
이윤경 씨가 체험원을 처음 오게 된 이유는 허브 때문이었다. 자녀를 보살피려는 부모의 마음이 자녀들을 다 키우고 난 후에는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식물로 이어졌다고 한다. 언젠가는 도시를 떠나 정원이 있는 집에서 꽃과 허브를 가꾸고 싶다는 꿈도 있었다. 그 꿈은 2017년 허브 강의를 듣던 중 지인을 따라나섰다가 알게 된 체험원에 이르렀다. 2018년부터 작년까지 정원 멘토로 활동하며 정원을 가꾸고 싶다는 소박한 꿈이 이루어졌다.
이윤경 씨는 다른 멘토들과 열심히 체험원의 드넓은 정원에 금잔화, 마리골드, 세이지, 제라늄, 타임 등등 다양한 화초와 허브를 키우고 관리했다. 그래서 사시사철 체험원의 정원은 아름답기로 유명하고, 지역주민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그런데 정원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움이라는 결과만 볼 뿐, 과정에 대해 잘 모른다.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이 되기까지 체험원의 멘토들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를. 꽃과 허브가 아름답다고 가꾸는 일마저 우아한 것은 아니었다. 이윤경 씨에게 정원을 가꾸는 일에 관해 물었을 때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답이 돌아왔다.
“정원 관리는 잡초와의 전쟁이에요. 오시는 분들은 꽃을 가꾸려고 왔는데 잡초만 뽑고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시죠. 꽃을 심는 건 잠깐이에요. 가장 많이 하는 것은 잡초를 뽑는 거죠. 그게 정원 관리죠. 텃밭도 마찬가지잖아요.”
체험원에서의 봉사활동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환경에서 각자가 좋아서 즐기면서 하는 일이라고 쉽게 말할 게 아니었다. 공원을 즐기는 이들에게 좋은 환경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지만,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일은 멘토들의 몫이다.
“정원 관리가 어렵긴 어려워요. 워낙 잡초도 많고. 반려견을 많이 데려오세요. 대변을 잘 처리해서 가시면 좋은데 그냥 놓고 가시는 분들도 많아요. 그래서 민원도 들어오고요, 쓰레기를 놓고 가는 분들도 있거든요. 꽃과 화초를 가져가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그래서 아침에 오면 쓰레기를 주우면서 하루를 시작해요.”
그래도 보람된 일이다. 자연을 가꾸면 곤충들이 찾아온다. 그러면 아이들이 찾아온다. 아이들이 해맑게 뛰어노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난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아름다운 공간을 자신의 힘으로 가꿨다는 사실에 뿌듯하다. 이윤경 씨는 하염없이 풀을 뽑고 있으면 잡념을 사라지는 소위 ‘풀멍’에 빠지는 게 좋다고 웃으며 말했다. 정원 가꾸기도 자신에게는 너무나 즐거운 일이다.
.“사시사철 볼거리가 있는 정원이 되도록 가꾸죠. 말채나무라고 있어요. 겨울철 아무것도 없을 때도 빨간색과 노란색이 어우러지죠. 정원을 예쁘게 꾸며놓으시니깐 사계절 아무 때나 와도 볼거리가 있어서 좋아요.”
이윤경 도시농부가 아이들과 함께 가꾸는 '행복한 숲' 텃밭
체험원에서 이룬 또 하나의 꿈
본인에 대한 이야기가 부족하다며 난감해하는 기자에게 이윤경 씨는 수줍게 한 가지 자랑거리를 털어놓았다.
“작년에 제가 진행한 자유학년제 학교텃밭 프로그램이 농정원에서 주최하는 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거든요. 자유학년제는 아이들의 직업 선택을 위한 체험활동이잖아요. 저는 아이들이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어요. 꽃바구니를 만드는 것도 하고, 라탄 바구니를 짜기도 했고, 행잉 식물이라고 해서 공기정화식물을 만들기도 했죠. 환경교육도 같이하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들로 구성했죠. 그래서 상을 받지 않았나 싶어요. 그거 하나 자랑할 거밖에 없어요.”
체험원에서 이윤경 씨가 가장 보람을 느끼는 일도 교육이다. 그는 체험원에서 작은 텃밭을 어린이집 아이들과 함께 가꾸며 텃밭 교육을 하고 있다. 조만간 성인으로 대상으로 허브 관련 교육을 진행할 예정인데, 아마도 그가 자랑하지 않은 솜씨를 학생들을 앞에서 선보일 것이다. 교사는 정원을 가꾸기와 함께 오랫동안 갖고 있던 그의 꿈이라고 했다. 그는 체험원에서 자신의 꿈을 이뤘다.
멘토(mentor)는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떠나며 자기 아들의 보호를 부탁했던 지혜로운 노인의 이름이었다. 후진들에게 조언과 상담을 주고 도움을 주는 조력자. 타인이 빛나도록 애쓰는 사람. 이윤경 씨야말로 진정한 멘토다. 아름다운 도시농업공간, 체험원에는 그곳을 빛내는 보이지 않은 멘토들이 있다.
최승덕 책임편집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