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익는 계절이다. 가을볕이 따스하게 내리고, 바람이 선선하게 불면 콩도 누렇게 익어간다. 푸르던 콩잎이 낙엽이 져서 떨어지면 가지 사이사이로 콩깍지가 얼굴을 내민다. 성질 급한 콩 몇몇은 콩깍지를 터뜨리고 튀어나오기도 하는데, 이때 콩을 베어 두지 않으면 다 땅에 떨어져 버리고 말아서 일일이 한 알 한 알 손으로 주워야 하는 수고를 할 수 도 있다.
더할 나위 없이 쨍한 날을 택해 마당에 네모난 멍석 두 세장을 이어 깔아 놓는다. 여기에 미리 베어 둔 콩대들을 이리저리 늘어놓고 나면 이제는 도리깨가 등장할 차례다. 지금은 익숙하지 않은 농기구지만 농가에는 집집마다 몇 개씩 있어야 했다. 긴 장대 끝에 다시 짧은 칡넝쿨이나 대나무가 여러 개 달려있어 긴 장대를 잡고 휘두르듯 내리치면 작은 막대들이 빙빙 돌아서 바닥을 탁탁 쳐주는 구조다. 봄에 보리타작부터 가을의 콩 타작과 들깨, 참깨를 터는데 아주 요긴하다. 조선 후기 문인 정학유가 쓴 농가월령가에는 ‘도리깨 마주 서서 짓내어 두드려’ 보리타작을 하는 모습을 표현하기도 했다.
▲ 콩 타작 준비를 위해 콩대를 늘어놓았다.
콩 타작은 노동이지만 흥이 난다. 이렇게 흥이 나는 건 도리깨 때문이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몇 번 도리깨질을 해보면 금세 몸에 익어 사용할 수 있다. 휘익휘익하고 도리깨가 돌아가면서 콩대를 두드리면 마른 콩깍지가 터지면서 타닥타닥 하면 콩알들이 털어져 나온다. 양이 많으면 두 사람이 마주 서서 번갈아 도리깨질을 하는데 마치 둘이 마주 앉아 다듬이 방망이질을 하는 듯 호흡을 맞춰지고, 여기에 콩들이 튀어나오는 소리가 더해지면서 흥겨운 박자가 된다. 분명 고된 노동이지만 도리깨질로 힘을 덜어 이렇게 콩, 깨 털고 벼 베기까지 마치면 식구들 먹을 일 년치 양식이 생기게 되는 것이니 마다하지 못하는 일이다.
지금이야 콩 농사도 다 기계화되어 이런 풍경을 볼 수 없지만 이렇게 타작해 먹었던 콩만은 농부의 손에서 손으로 이어져 지금도 키워지고 있다. 지금은 토종콩이라 불리는 그것이다. 알려진 것처럼 한반도에서 만주까지를 포함한 지역이 콩의 원산지다. 특히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다양한 콩이 재배되어 왔는데 농진청 유전자원센터나 대학연구소에서 현재까지 수집, 보관되고 있는 종류는 무려 8,000여 종에 이른다.
다양한 품종의 콩은 다채롭게 쓰였다. 우리가 흔히 아는 노랑콩은 메주를 만들어 장을 담가 된장과 간장으로 갈랐다. 그래서 흔히 메주콩이라고 부른다. 오리알태, 수박태는 시루에 담아 물을 주고 키우면 하루가 다르게 자라 콩나물이 된다. 흰머리가 검게 된다는 검정콩은 서리 내릴 때 수확해서 서리태라고 부르고, 새까맣고 작은 모양이 쥐의 눈을 닮았다는 쥐눈이콩은 약성이 있어 한방에서 약재로도 사용됐다. 이중 특히 맛이 달고 고소한 콩을 골라 밥 지을 때 넣어 먹었는데 이런 콩들은 따로 ‘밥밑콩’이라고 부른다. 먹물이 든 것 같은 무늬의 선비잡이콩과 아주까리를 닮았다는 아주까리 밤콩 같은 것들이다.
▲ 먹물이 묻은 무늬가 있는 선비잡이콩
농부에게 이어지던 토종콩은 이에 얽힌 이야기도 같이 이어져온다. 어느 옛날,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길을 나선 선비가 있었다. 길을 재촉하였지만 날이 어두워져 어느 마을 언저리의 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딱히 대접할 것이 마땅치 않았던 이 집에서는 집에서 키운 콩을 한 줌 넣고 밥을 지었는데 선비는 이 밥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다음 날, 길을 떠나야 하는데 이 콩밥의 맛이 머리에 맴돌았다. 하루를 더 머물면서 밥을 얻어먹게 되었다. 그런데 이 하루가 또 하루가 되고, 다시 또 하루가 되어 이 집에 눌러앉아 이 집 사위가 되어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너무 맛이 좋아 선비를 잡아두게 한 것이 바로 ‘선비잡이콩’이다. 선비콩, 선비잽이콩이라고 하도 정승콩이라고도 부른다, 기록에는 선비 유(儒), 잡을 집(執) 자를 사용해 유집(儒執)이라 했다.
▲ 선비잡이콩은 맛이 달고 부드러워 밥밑콩으로 좋다.
다양한 콩은 특별한 식문화도 만들었는데 두부가 그것이다. 서민들은 콩을 갈아 응고시켜 집집마다 두부를 만들어 먹었다. 나라에서는 각종 행사에 두부가 사용되었는데, 두부를 잘 만든다는 절을 ‘조포사’(造泡寺)로 지정해 각종 제례에 쓰일 두부를 만들도록 했다. 특히 절에서 두부를 많이 만들어 먹었기 때문에 두부를 만드는 기술도 좋았기 때문이라 한다.
어릴 적 마당에 가마솥을 걸고 콩을 삶아 두부를 만드는 날의 기억이 있다. 고소하고 따끈한 두부를 얻어먹을 생각에 마당을 떠나지 못하고 빙빙 돌았다. 두부가 만드는데 반나절 이상이 걸렸지만 기다림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두부를 먹을 수 있는 것도 좋았지만 한동안은 비지며 콩물 같은 것도 같이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기대가 더 컸기 때문이리라.
▲ 고소한 밤맛이 나는 아주까리 밤콩
올해에서 텃밭에 선비잡이콩, 아주까리 밤콩, 쥐눈이콩을 심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콩 익는 계절이 되었다. 두부 만들기는 엄두를 못 내더라도 막대기로 콩 타작을 벌여볼 생각이다. 도리깨는 없지만 아이에게 막대기를 쥐어주고 콩대를 탁탁 두드리며 함께 콩 타작을 할 것이다. 그렇게 농사를 짓고, 거두고, 다시 이어간다.
<초보 도시농부를 위한 콩 재배법>- 가을에 수확하는 콩은 바쁜 봄 농사철을 지나고 6월경에 심어준다.
- 너무 얕지 않게 땅을 파고 콩 2~3알을 넣어준다. 간격은 30cm 정도가 적당하다.
- 땅을 가리지 않고 잘 자라기 때문에 자투리땅이나 텃밭 주변을 활용하면 좋다.
- 수확한 콩 중에서 상처가 없고 알이 실한 것을 골라 내년에 다시 심을 씨앗으로 준비한다.
황의충 동네정미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