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도시텃밭은 누가 뭐래도 배추 잎의 초록색으로 물든다. 간혹 무나 갓을 찾아볼 수 있지만 배추에 비할 바 아니다. 도시농부들은 8월 말부터 배추를 심기 위해 밭을 갈고 모종을 구입하기에 분주하다. 덩달아 바빠지는 곳이 꽃가게인데 배추 모종을 준비하지 않은 곳이 없다. 배추 철에는 서울 양재동이나 광명 꽃시장, 일산 화훼공판장에는 꽃보다 배추가 많아 보인다. 도시에서 키우기 좋게 만들어진 무 모종도 간간이 등장하는데 아무래도 무는 씨앗으로 심는다는 인식이 강해서인지 배추 모종 인기에는 많이 모자라 보인다.
도시농부들의 배추 사랑은 유별나다 싶은데 정작 배추의 품종은 별로 따지지 않는다. 서울에 모종으로 많이 판매되는 배추는 ‘불암 플러스’, ‘CR참진’, ‘휘파람’, ‘베타 후레쉬’ 같은 것들인데 이런 이름을 적어놓고 파는 곳은 드문 편이다. 사람들은 배추의 품종보다는 병충해에 강한지, 속이 잘 들어차는지를 물어보고 주인장이 추천하는 품종을 구매한다. 특히나 속이 노랗게 꽉꽉 들어차 알배기가 되는지가 선택의 핵심이다.
모종을 심고 나면 여기에 들이는 정성도 보통이 아니다. 상추나 토마토, 고추 같은 봄 작물을 심었을 때보다 훨씬 더 자주 밭에 들르고 물을 많이 준다. 중간에 잎이나 열매를 계속 수확하지 못하고 11월이 되어 한 번에 수확을 하는 작물이니 기대도 높고 그만큼 많은 노동력을 투여한다. 하지만 물만 자주 준다고 잘 자라는 것은 아니니 이때부터 화학비료와의 갈등도 시작된다. 많은 공동체 텃밭들이 화학비료나 살충제등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는데 속이 덜 차는 배추를 보고 있자면 여러 가지 유혹이 생기는 모양이다. 텃밭지기 노릇을 하던 때 일인데 바지 주머니에 비료를 넣어와 한 줌 씩 몰래 뿌려주는 걸 보고 이걸 막아야 하는 어쩌야 하나 고민에 빠진 적도 있었다. 공동체의 규칙이 적용되는 게 배추 키우기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 보통 속이 노랗게 들어찬 배추를 선호한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도시의 배추밭은 논쟁에 빠진다. 10년이 넘는 도시농업 역사에서 아직 합의되지 못한 것인데 배추를 언제 묶어줄 것 인가하는 것이다. 특히나 공동체 텃밭, 주말농장에서 많이 생기는데 어느 날 누군가가 제일 먼저 배추를 굴비 엮듯이 꼼꼼히 묶어 놓고 나면 빠르게 촉발된다. 나도 묶어주어야 하나? 좀 더 기다릴까? 하다가 이내 질문이 시작된다. ‘황선생! 배추 언제 묶어야 해? 옆에는 벌써 묶었던데.’
매년 가을이면 듣는 얘기다. 처음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배추가 속이 찬다는 건 말입니다. 옥신이란 성분이 있는데요, 이게 주로 배춧잎 뒤에 집중돼있어서 광합성을 통해 세포가 발달하면 잎이 겹겹이 서게 되거든요. 그렇게 속이 차는 원리죠. 그래서 광합성이 필요하니 안 묶는 게 더 좋아요. 요즘 개량종 배추들은 묶지 않아도 다 결구가 잘 되는 품종입니다.‘
잘 설명했다 싶었는데 다음날 와보니 역시나 굴비 엮듯이 줄줄이 묶어 놓았다. ‘옛날에는 다 이렇게 했다는데’하는 말도 같이 건네진다.
▲ 찬바람이 불면 배추를 묶어주는 사람들이 많다.
옛날에는 정말 모두들 배추를 묶었을까? 100년 전에는 꽤 많이 배추를 묶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마도 서리 내리기 전의 가장 바쁜 일과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이용기가 쓴 ‘조선무쌍 신식요리제법’에서 배추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조흔 배추는 서울 안에서 일흠난 방아다리 느티골이나 훈련원 것이 데일이요 다른 곳 것으로는 이 두 군데를 당할 배추가 업나니…>라고 적고 있다. 서울에서 이름난 배추가 난다는 방아다리 느티골과 훈련원은 지금의 종로구 충신동과 인근의 동대문 훈련원 공원이 있는 지역을 말한다.
전국적으로는 개성배추와 서울 배추(경성 배추)를 최고로 알아주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도시농부들의 관심을 받으며 토종배추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그 배추들이다. 이 토종배추들은 속이 차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요즘 표현으로 비결구 배추인데 갓이나 무청을 연상하면 이해가 쉽다. 지금 배추와는 모양도 맛도 다른데 속이 차있지 않고 잎이 펼쳐져 있으니 서리가 내리고 나면 속까지 다 얼어 버린다. 그러니 배추를 묶어서 보온을 해주어야 좋은 배추를 수확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개성배추 (이미지 출처 : 한겨레신문 홈페이지)
지금은 흔한 속이 차는 배추, 즉 결구배추는 일제강점기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 이주한 중국인들이 김포 일대에서 키웠다는 기록이 있다. 지부배추나 산둥배추, 만주배추 같은 배추들인데 중국에서 온 배추라 하여 호배추라 불렀다. 호배추는 통이 크고 무게도 많이 나가 조선총독부에서 재배를 권장하기도 했는데 토종배추에 비해 감칠맛이 없다고 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김치 없이는 제대로 된 밥상이 아닌 것으로 여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호배추는 물맛이 나는, 입맛에 맞지 않는 배추였을 것이다.
이런 호배추는 1950년대부터는 제법 많이 재배되었는데 속이 결구가 되니 추위에 강하고, 서리가 내리더라도 겉잎만 떼어내면 먹을 수 있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키우기 수월하고 생산량이 많은 작물에 입맛을 맞추어야 하는 때였다. 화학비료가 대규모로 보급되고 배추 소비도 늘어나는 1970년부터는 노랗게 속이 차는 호배추가 배추 하면 떠오르는 지금의 주류 결구배추가 되었다.
도시텃밭의 배추들은 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다. 그 시절의 추억이기도 하고 잘 키워 살림에 보탤 요량도 있다. 그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좋아서 이기도 하고,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자기만의 사정도 있을지 모른다. 나는 배추를 언제 묶어야 하냐는 논란이 끊이지 않길 바란다. 서울 동네 구석구석 텃밭에서 배추 키우는 이야기가 구구절절 이어져 가길 간절히 원한다.
그래도 배추를 언제 묶어주냐 묻는다면? 마음이 불안해질 때가 적기다.
<초보 도시농부들을 위한 배추 재배법>- 잎에 구멍이 없고 웃자라지 않은 모종을 선택한다.
- 모종간 간격은 30cm 이상으로 심어준다. 자라면 생각보다 좁아진다.
- 난각칼슘을 이파리에 뿌려주면 좋다.
- 20℃ 전후에서 잘 자라며, 4℃ 이하에서는 자라지 않지만 영하 5 ℃ 까지 견딜 수 있다.
▲ 도시에서 종종 화분에 배추를 심기도 한다.
황의충 동네정미소 대표